88 올림픽을 유치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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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서 세계3대 주요 스포츠 대회를 모두 개최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어요
세계3대 주요 스포츠대회는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이지요
지금까지 세계3대 주요 스포츠 대회를 모두 치러낸 나라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등 단 4개국에 불과하였으나 여기에 한국이
다섯번째 국가로 이름을 올림으로써 세계 스포츠 흐름을 주도하는 나라로 우뚝 서게 되었어요
동방의 작은나라 그것도 허리가 잘린 나라에서 세계5대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설수 있었던 것은 모름지기 튼튼한 경제가 뒷바침
되었기 때문이며 그 만큼 우리나라가 경제강국임을 세계만방에 고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스포츠는 돈없이는 절대 할수 없는것이며 세계적인 대회 또한 돈 없이는 절대 유치할수 없는 것이라 하지요
그럼 여기서 세계3대 스포츠대회를 유치하게 되었던 재미있는 뒷이야기를 88 올림픽과 월드컵 그리고 평칭 올림픽에 대하여 올려볼까 하네요
그럼 먼저 88 하계올림픽에 대한 이야기인데 1987년 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퇴임하면서
기자들에게 88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뒷이야기들을 털어놨어요
그 내용 전문을 여기에 실어 볼께요
내가 전경련 회장을 하면서 이렇다하게 내세울 이야기를 굳이 찾는다면 경제 외적인 일로 88올림픽을 체육계의 협력을 얻어서
전경련 주도로 우리 경제인들이 유치했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88올림픽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일본은 일찍부터 유치를 위해 공을 많이 들여 놓았으므로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 없었지요
그런 얘기를 왜 할수 있느냐 하면 우리나라 대한체육회가 김집 부회장을 도쿄(東京에)에 보내서 일본측에 제의하기를
"88올림픽을 우리하고 일본 나고야(名古屋)가 경쟁하고 있는데 우리가 취소하고 일본이 하도록 해 줄테니
그대신 86아시안게임을 우리가 하도록 도와 달라"고 얘기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일본이 퇴짜를 놨어요 88올림픽은 자기네가 된 걸로 다 자축 건배까지 했는데 우리가 왜 구질구질하게 86년 아시안게임을
한국 개최 지원이라는 짐을 지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대한체육회는 88올림픽을 아예 포기한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그러나 대통령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고 나라가 크게 융성하려면 세계적인 행사를 한번 치루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때는 문교부에 체육국이 하나 있을때 였어요
그런데 문교부장관이 대통령께 88올림픽 유치는 일본의 아성을 넘을수가 없다고 보고 하니까 대통령께서 버럭 화를 내면서
"그게 무슨소리냐? 최선을 다해서 도전해보지도 않고 패배주의로 임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라도 총력을 기울여 올림픽을 유치해 보라고 한 것이지요
올림픽 유치결정이 9월 30일에 있는데 그때가 4월달이었어요 88올림픽 유치하던 해가 81년이고 전두환 대통령 때였지요
물론 내가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때 였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교부 국장이 누런 종이에 프린트한 것을 하나 가지고 와서
장관이 대통령 결재까지 맡았다고 하면서 민간 7인 위원장이라는 것을 들고 왔어요
그러면서 체육국장이 하는말이 "유치는 못하더라도 정부의 체면만은 서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것참!! 할려면 확실히 하는거구 안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말어야지!! 얼어죽을 체면은 또 무엇인가?"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88올림픽을 어떻게 유치하는지? IOC위원이 누구인지 알기나 합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 이지... 어찌되었든 대통령의 특명이니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자고 하니까 88올림픽은 대한민국
국가가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유치하는 것이므로 서울시장, 문교부장관, 대한체육회, KOC위원들을 불렀어요
그런데 서울시장은 안 나오고 국장이 나왔고 조상호 KOC회장, 최만립 총무가 나왔지요
그런데 이 회의에서 체육국장이 하는말이 우선 30분짜리 영화를 만드는것이 시급하다는 거에요
서울시가 올림픽을 개최할만한 여러가지 환경과 제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3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서 전시장에 가서 선전을 해야 된다는 거지요
경기장 모델도 만들고 그것을 IOC위원회가 열리는 나라에 가서 그것을 보여주며 설득을 해야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IOC위원을 모셔다가 보여주는 홍보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 이런 영화를 만들려면 1억8천만원 정도가 들어가고
그것을 서울시가 줘서 즉각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서울시가 예산이 없다는 겁니다
위에서 결정했으니까 하긴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은 국회가 예산 주는것이 아니라 국무총리에게 가서 추가예산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 하겠다는 겁니다
윗분은 그렇게 지시했지만 밑에서는 움직이질 않겠다는 것이지요
가봐야 비용만 나고 돈만 없어진다는 그런 뜻인것 같았어요
정말 할말이 없었지요
소위 이름 가는데 마음 간다고 어쨌든 일은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산은 언제 세우는 거냐니까 명년에 세운다는 겁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금년 9월달에 올림픽 유치결정이 나는데 예산을 내년에 세운다니 .....
그래서 어찌하나 볼 요량으로 우선 급하니 내가 그 돈을 입체해서 사용을 할테니 명년에 예산을 세워서 내게 주겠느냐고 하니까
그렇게 할수 있다 못하겠다 말을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옛말에 급한사람이 우물판다고 내가 그 돈을 입체해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 후에 예산 세워서 내 돈 돌려줄 줄 알았지만 영화 만든후 기부체납으로 도장 찍으라고 해서 내 돈만 날아가고 말았지요
아무튼 서둘러 경제협력단을 꾸리고 독일(바덴바덴)현지에 가서 활동을 시작 했는데 정부에서도 몇사람이 나와 일을 하고 민간측인
전경련에서는 유럽 각국 경제협력단을 가동했지요 한영경제협력위원장은 그때 내가 겸임을 했고, 한불은 조중훈씨가 맡고 있었어요
그때는 각국마다 경제협력단이 다 있었지요
그것을 총 동원하고 그 다음엔 국제적 감각이 있고 안면이 있는 유창순씨께 부탁해서 동원하고 그 다음엔 건설회사들,
가령 동아가 스웨덴에서 무엇을 했다하면 스웨덴을 책임지고 삼성이 사우디에 진출해 있으면 사우디를 책임지는 방법으로 건설업자를
통해서 그 나라 IOC위원을 만나고, 각 위원들은 자기네가 친한 그 나라 업자를 통해서 그 나라 IOC위원을 만나는 것이지요
올림픽을 한 나라는 IOC위원이 2명이고, 안 한 나라는 1명 이지요
우리나라는 1명이고 일본은 2명이죠. IOC위원이 총 82명인가 였는데 몰라서 그렇지 얼굴만 알면 82명 쫓아다녀서 표만 모으면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난 그때 거기 가서 영국, 벨기에를 쫓아다녔지요
그때 남덕우총리가 스칸디나비아 쪽에 회의가 있어 그곳에 갔는데 스칸디나비아국 IOC위원들이 안 만나 주더란겁니다
코리아는 머리 속에 없다 이거지요 난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몇 나라를 돌고 전상진 대사는 남미쪽,
또 김운용 IOC위원도 몇 나라 돌고 왔어요
그런데 경비가 문제 였어요
거기 갔는데 누가 움직여야 되잖습니까? IOC위원 쫓아다니고 점심 사주고 저녁 사주고 해야 하는데 자동차 없이 걸어 다닐수는 없지요
정부에서는 1전도 안 주니까요 .. 어떻게 해요? 또 돈보따리를 풀었지요
어쨌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열흘 동안, 참, 아마 내 생애에 그렇게 계획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뛰어 다녀보긴 처음이었어요
거기 와 있는 모든 사람들은 특파원들까지 동원하고 각국 대사들은 다큰 자녀들까지 데리고 오고 해서 거기에 한 60~70명 모였는데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한 표라도 더 주워 모으려고 합심해서 노력한 것은 내 일생에 처음있는 일이었지요
정부에는 자유진영표중 한 20표라도 얻으면 나라 체면유지는 된다고 했지요
새벽부터 밤까지 뛰고 10시에 모여서 표를 점검하는 거예요
매일 그렇게 했는데 첫 번째는 체면유지고 그 다음엔 어떻게 하면 가능성도 있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경쟁국인 일본 사람들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사람들이 와서 방해를 하는 거예요 알고보니 북한사람들 한 20여명이 와서
일본사람들과 짜고 함깨 뛰고 있지 뭡니까? 정말 난감하더라구요
일본사람이 어떻게 얘기를 하냐하면 남북이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휴전선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거리인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는 것은
88올림픽을 취소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선전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북한사람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면 우리네 가만두지 않을겝니다"하며 엄포를 놓고 다녔어요
소위 중간지역국가들 단체 있지요? 비동맹국가들 ... 우리는 거기에 못 들고 북한은 들어 있잖아요
북한은 비동맹국가 표를 일본에 모아 주고 동구권표 모아주는데 활동하고 있었어요 업친데 겹친꼴이 되었지요
그런데 일본은 IOC위원들에게 세이코 시계를 나눠 준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거기다가 일본 친구들이 전시장을 거대하게 만들었어요
이때는 정말 오기(傲氣)가 나더라구요
"이왕 시작한거 질수야 없지 !! 건설이야 우리가 최고 아닌가? ...
" 그래서 본사(현대)에 연락하여 지원을 받았고 또 돈 보따리를 풀어 우리도 근사하게 전시장을 지었어요 동계올림픽 신청국도
서너군데 만들었는데 우리것이 제일 멋있었어요
참 혼신의 정력을 다 기울였던 거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정작 당사자인 서울시장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요
일본 사람들은 20일부터 전시관을 개관하고 IOC위원, 나고야 시장 등이 18일부터 독일에 와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IOC위원도 서울시장도 독일에 오질 않았어요 우리 민간 경제인들만 코피나게 뛰고 있었던 거지요 IOC위원이 안 들어오면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 하면 IOC위원들은 신변보장 때문에 한 호텔에 모아놓고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 하고 있었어요
IOC위원이 면회한다고 허가한 사람들만 들어가서 만날수 있었지요
호텔에 들어가야 타국의 IOC위원들을 만날수 있는데 우리나라 IOC위원 마져 안왔으니 아예 호텔을 들어갈수가 없는거에요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나라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씨와 월터 정이 IOC의 배려로 그 호텔에 묵고 되었어요
장기영씨는 IOC위원에 면식이 많아 준 IOC위원 대접으로 그 호텔에 묵게된 것인데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 법
그 양반을 면회한다고 무턱대고 들어갔어요
그분이 들어오라고 해야 들어갈수 있는곳인데 우리는 장기영씨을 믿고 무턱대고 활동했지요
사실 뒷 이야기지만 장기영씨가 뒷 마무리를 정말 잘해 주었어요
대한체육회장을 지내다 77년에 IOC 위원이 된 김택수씨가 22일 저녁에 현지에 왔어요 그래서 잘 왔다고 하면서 우리가 IOC위원들에게
꽃바구니을 보내려고 하는데 당신이 안 와서 못했다며 당신 이름으로 보내려고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하니까 그분 얘기가 영어로 뭡니까,
무슨 '콜' (프로토콜:의전)에 위배돼서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같은 IOC위원인데 IOC위원들에게 꽃을 보내느냐" 이거에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는데 그런 거 떠나서 보내자 했더니 자기 격이 떨어져서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할수없이 내 이름(대한민국 올림픽 유치워원장 정주영)명으로 보냈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기나 해요?
어쨌든 꽃은 꽃가게에서 일일이 정성을 들여서 기가 막히게 만들어 보내게 했어요 한 이틀 있다가 서울 시장이 왔어요
그 꽃이 3-4일 지나면 시드니까 이번에는 과일 상자를 서울시장 이름으로 보냈지요
서울 시장은 흔쾌히 승낙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주효했어요
총회 하루전날 리셉션을 했는데 일본 사람들 한테는 시계를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한테는
아름다운 꽃과 과일을 보내서 고맙다고 내놓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꽃을 보낸 뒤부터 IOC위원들이 잘 만나 주었지요
큰 효과를 봤어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꽃은 인간의 감성을 흔들수있는 마력이 있나봐요
그리고 미국 IOC위원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어느어느 위원이 호의적이라는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었지요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한사람씩만 더 부탁한다고 집중적으로 부탁했어요
먼저 환심을 산 IOC위원들이 다른 IOC위원들하고 24시간 붙어있다는것을 이용했지요
"잘해보라"고 하는 표는 미심쩍지만 일본이 이러저러하니까 한국은 이렇게 하라고 코치하는 표는 우리 표지요
속셈은 알수 없지만 감을 잡아서 그 표는 우리 표라고 생각하는거지요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도 일본표가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쓸수있는 패는 후진국표를 얻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남미나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의 IOC위원들에게 부부를 한국에 초청한다고 대한항공 조중훈씨가 왕복 비행기표를 약속 했지요
그 사람들은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어요 이 패는 의외로 주효했어요
그래서 남미와 아프리카 표를 얻었는데 그것은 뇌물이 아니지요
초청하는 사람이 왕복비행기표를 주는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마지막 까지 훼방을 놓은 사람들은 일본사람이 아니고 북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를 만날때 마다 인상을 찌뿌리고 언성을 높여 욕을 하였지요
그러나 우리는 북한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었어요
북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해도 우리는 웃으면서 대응하자고 했지요
우리가 같이 싸우면 IOC위원들이 남북한이 정말 긴장 상태라 안되겠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우리가 웃으면서 얘기를 하면 저 사람들은
'농 도 언성을 높여서 하는구나' 할테니까요 "이북에는 작년에 풍년이 들었다죠?" 하면 "예, 대풍 들었시요.
" 크게 얘기하는 식으로 좋은 얘기만 하고 이북의 명산대천, 온천, 원산해수욕장 등 좋은 것만 칭찬해주니까 나중에는 입이
이렇게 커지고 하나도 싸울 일이 없었지요 그래서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는 속담이 있나봐요
개표 전날 서독 지방신문이 우리나라를 많이 비하 하였어요
그 지방신문이 정말 질 나쁘게 썼지요 하계올림픽은 일본으로 다 끝났는데 한국 사람들은 울면서 돌아가야 할 것들이 아직도 웃으면서 표
얻으러 다닌다고 썼어요 그날 오후에 이북 대표를 만났는데 그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정선생 그만 수고하고 돌아가시라요"
"왜 돌아갑니까? 끝장을 보고 돌아가야지요" "오늘 서독신문 못봤읍네까?"
"나는 독일말 몰라서 못 봤습니다." "다 끝났다고 썼습디다.
그러니까 돌아가시라요. 도저히 되지도 않을일을 왜 하십네까? 힘빼지 마시고 돌아가시라요"
"허허 그럴까요? 그런데 우리가 몇표 받을것 같은가요?"
"음 ~ 세 표 나올 겝니다" "어디어디 표가 나올까요?"
"한국표 하나하고, 대만 표 하나, 미국 표는 둘인데 그 중 하나는 한국을 주고 하나는 캐나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쓸겝니다"
"허허 그런가요? 세 표면 됐습니다, 안심이군요" 하고 돌아섰는데 북한 사람과 다투어도 소용없거든요.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다가 왔지요
로스앤젤레스 신문기자가 개표날 아침에 테이블을 차려놓고 기자들만 10불씩을 내고 내기를 하는 거에요 1
0불씩 내고 어느 도시가 되는가를 쓰는 거지요
서울이냐? 나고야냐? 쭉 적은 것을 보니까 오전에는 일본 나고야가 된다고 대부분 썼는데
오후 되니까 여러 기자들이 서울이 된다고 쓰는 거예요
참 기자들은 센스가 있어요 2대8에서 4대6 정도로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본이 된다고 한 것이 좀 많았어요
이 광경을 보고 우리나라 특파원도 나를 보고 "정회장님 내기하자"고 했어요 "회장님은 어디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난 한국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 "안될겁니다" "허허 그럴까?" "회장님 그럼 내기하시지요?"
"그래요 당신 걸고 싶은 데로 걸으시오" 그는 미화 20불을 걸었어요
그러면서 내 참모인 이병규 부장에게 20불을 주었지요 나도 20불을 이병규 부장에게 주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되니까 그 돈 내가 싹 먹었어요 개표하니까 52표 대 27표가 나왔지요
그 특파원은 한국에 돌아와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20불에 몇배로 내가 대접 했지요
사실 88올림픽을 유치하기 까지는 정말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 경제인들 김우중, 조중훈, 최원석 회장 등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고생많이 했어요
정부도 그렇게 협조해주기를 희망했었지요
서울시와 대한체육회가 포기했던 것을 우리 경제인이 바덴바덴에서 유치하는데 성공한 쾌거 였어요
그때 그 감격은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었지요
그러나 내가 전경련 회장을 안 했으면 끌고 갈 힘이 없었고 생각도 해볼수 없었을 거에요
전경련 재임 중에 전경련 바깥일이긴 하지만 국가를 위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렇게 일해본 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었지요
사실 이제서야 털어 놓는일이지만 우리나라가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한것은 또 다른 비장의 카드가 있었어요
1988년 올림픽 유치엔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경쟁 중이었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늦게 유치경쟁에 뛰어 드는 바람에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일본은 이미 IOC 부위원장을 배출했을 정도로 스포츠 외교에서 영향력이 컸었어요
우리나라는 일본이랑 비교조차 할수 없을정도로 열악했지요 그
래서 IOC 위원들을 직접 만나 지지를 끌어내는 데엔 한계가 있었어요
결국 우리 유치단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지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법을 아시는지요?
우리나라 유치단이 아닌 다른 사람이 IOC위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요 당시 우리나라 유치단은 유치 기간 동안 시내가 아닌
외곽의 호텔에 숙소 배정을 받을 정도로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인지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유치단은 한국의 매력을 잘 보여줄수 있도록 한국 전시관을 만들었고
화환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유치위원장 명의로 IOC 위원들에게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지요
하지만 확실하게 IOC 위원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좀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어요
그러던 차에 떠오른 인물이 있었지요 바로 아디다스사의 "다즐러 회장" 이었어요
그는 IOC 위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스포츠계의 ‘큰 손’으로 통했지요 당시 IOC 사마란치 위원장도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즐러 회장과 의논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어요 다즐러 회장만 우리편으로 돌리기만 한다면 유치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질 상황이었지요
(이때 정주영회장의 빛나는 지기(知技)가 발동 했어요) 떡은 떡메로 치라는 말이 있듯이 스포츠계는 스포츠계 대부로 승부를 걸기로 했어요
즉시 본사로 연락하여 아디다스사의 다즐러 회장에게 현대자동차 스포츠카 개발에 자문을 요청한다는 문서와 함께 미팅을 주선하도록 하였지요
그렇게 하여 다즐러 회장과 만날 기회를 만들었어요
올림픽 유치에 큰 힘이 될수 있는 인물과의 미팅 ... 떨리고 흥분 되었지요
그 자리에서 정주영 회장은 스포츠카 개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계도가 나온뒤에 다시 상의 하기로 하고 목전에 있는 88올림픽 유치에 그
특유의 솔직함을 드러내며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는 정회장의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며 우리 대표단에게 이런 요구를 했지요 “내가 만일 한국을 적극적으로 밀어
올림픽 유치를 성사시켜 준다면 TV 방영권 및 기타 사업권을 줄수 있습니까?” 이 제안을 들은 우리 유치단은 쾌재를 불렀지요
“올림픽만 유치되면 중계권 등은 큰 문제가 아니다”란 판단 하에 다즐러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사실 이때는 IOC에서 TV방영권과 기타 사업권을 모두 가져가려고 하던 때였지요
우리 입장에서는 IOC에 주나 다즐러 회장에 주나 마찬가지 였어요
그렇게 해서 결과는 경쟁국 일본을 보기좋게 따돌리고
모두 아는 것처럼 ‘쎄울, 꼬레아’ 라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발표로 마무리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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