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俗離山)
서유기 5권에 보면 속세를 떠나는 장면이 나오지요
지금 가는 이 길은 오로지 간절하게 삼장 불경을 구하고
도를 수양하고자 정진하는 길이지요
새벽이면 길을 걷다가 밤이면 쉬고 목마름과 굶주림을 견디며 가다보니
어느새 봄이 가고 여름도 저물어 다시 가을이 되었지요
하루는 날이 저물자 삼장법사가 말을 멈추고 말했어요.
“얘야, 오늘밤은 어디서 쉴 수 있겠느냐?” 손오공이 말했어요.
“사부님! 출가하신 분이 속세 사람들처럼 말씀하시지 마세요.”
“속세 사람은 어떻고 출가한 사람은 어떻기에 그러느냐?”
“속세 사람은 이맘때면 따뜻한 침상 위에서 포근한 이불을 덮고, 품에는 아이를 안고
발꿈치로 마누라나 집적거리며 편안히 드러누워 잠을 자겠지요.
저희 같은 출가한 사람이야 어디 될 법이나 한 노릇입니까?
달빛 입고 별빛 덮고, 바람을 먹고 물가에서 쉬며,
길이 있으면 가고 길이 다하면 게서 쉬는 거지요
.” 손오공이 어디서 쉴수 있겠냐는 스승 삼장법사의 말에
속세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고 되려 면박을 주는 장면이지요
출가한 사람이 속세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고.....
이처럼 속세(俗世)란 세인들이 모여 알콩달콩 사는 세상을
속세라 하고 그 무리를 속인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바세계(娑婆世界)인데
모래알처럼 많은 인연을 바다같이 갖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옛말에 유유자적(悠悠自適)이란 말이 있어요
이는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가히 세월을 보내는것을 이르는 말이지요
여기서 속세를 떠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을 등진다는 뜻이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속세를 등지고 싶은 때도 있지요
삶이 너무도 고달플 때나 무언가에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할때도 모든것 다 버리고
자연을 벗삼고 그곳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속세를 벗어나 산을 찾는곳이 있어요
그곳이 바로 이름도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俗離山)이지요
이 속리산은 784년(선덕왕 5)에 진표율사가 김제 고을의 금산사로부터
이곳에 이르자 들판에서 밭갈이하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어요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회심(回心)이 저리 존엄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산으로 입산수도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지요
이때부터 사람들이 세속 '속(俗)' 자와 여윌 '리(離)' 자를 써서
‘속세를 떠난다’는 뜻으로 속리산(俗離山)이라 부르게 됐다고 하지요
다른 하나는, 신라 말 최치원이 이곳 속리산에서 읊었다는 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있어요
"바르고 참된 도는 인간을 멀리하지 않는데(道不遠人) 인간은 그 도를 멀리하려 든다.
(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山非離俗)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
(俗離山)" 신라 헌강왕 때 속리산 묘덕암을 찾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긴 시(詩)이지요
선생이 읊은 그대로 속리산의 속리(俗離)는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인데
충북 보은과 괴산, 경북 상주 화북면에 걸쳐 있는
그 옛날 속리산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어요
구절양장(九折羊腸)보다 더 힘들다는 열두구비
말티고개를 넘어야만 속리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세상이 어지러운 것인지, 자신이 어지러운 것인지
아무튼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속리산이었어요
속리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돼지’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보이지요
신라 중기까지도 봉우리가 아홉개라 하여 구봉산(九峯山)이라 불리던 산이
신라말기에 속리산(俗離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설 중의 하나가 위의 최치원의 싯귀이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산”이 되려면
“리속산(離俗山)”이라야 맞는 것이고
“속리산(俗離山)”의 원래 의미는 “속세가 산을 떠나려 한다”는 뜻이 되지요
속(俗)과 선(仙)을 파자(破字)하여 글자가 만들어진 의미를 음미한다면
사람이 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면 속(俗)이요 사람이 산에 들면 선(仙)이라는 것이지요
최치원의 싯귀와 파자(破字)풀이를 양손에 들고 보면 실로 선(禪)문답의 화두가 될법도 하지요
속리산은 천왕봉(1,057m)이 주봉이며 무수한 봉우리들이 기암 절경을 이루고 있어요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1,000m의 고산준봉들이 줄지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지요 수
백년 된 노송들이 운치를 더하고 백미의 암릉 아래 고산의 산죽들이 온산을 뒤덮고 있어요
속리산은 한국 8경의 하나로 예로부터 제2금강인 소금강이라고도 불러왔지요
또 구봉산․광명산․지명산․이지산․형제산․자하산 등 총 8개의 이름의 갖고 있어요
그만큼 신비롭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산인 것이지요
8개의 이름만큼이나 기암괴석과 암릉이 울창한 산림과 어울려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어요
속리산은 주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수정봉, 문수봉, 관음봉, 보현봉, 묘봉 등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연이어 사방 팔방으로 뻗은 산줄기는 짙은
운무로 산해(山海)를 이룬 듯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요
또한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등
여덟 개의 돌문이 있고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은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 여덟개의 돌이 있어요
이를 속리산 팔봉팔석문팔대(八峰八石門八臺)라고도 부르지요
한마디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 따로 없어요
재난을 피하는 피앗재 주변은 우복동(牛腹洞)으로 통하지요
우복동은 소의 뱃속 모양의 명당터를 말하는데 속리산 동남쪽 상주 화북면의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고 주장하지요
우복동(牛腹洞)은 정감록(鄭鑑錄)의 10승지에 해당하는데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 피난을 온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만큼 산이 깊다는 반증(反證)인데 우복동은 지리산 청학동(淸鶴洞)이나
경기도 가평군 조종천 상류 지역 협곡에 있었다는 유교사회의 이상향인
판미동(板尾洞)과 함께 전설적인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이지요
피앗재에서 정상 천왕봉(天王峯)은 조금 가파르지요
호흡을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고 내쉬며 발걸음을 쉼 없이 옮겨야 하지요
손에 잡힐 듯한 천왕봉도 가파른 오르막길에는 멀게만 느껴지는데
그래도 천왕봉은 천천히 다가와 마침내 발걸음을 살포시 멈추게 하지요
천왕봉은 우리나라 십이지종산의 하나이자, 세 갈래의 큰 물길 즉 한강․낙동강․
금강의 물길이 갈라지는 삼파수봉으로 불리지요
삼파수(三派水)는 달천수 우통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명수로 알려져 있어요
천왕봉에서 발원한 달래강은 북쪽으로 삼백리 길을 흐르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으로 합류하지요
달래강 인근 지명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달천’ ‘단월’ ‘단호’ 등은
모두 그 물맛이 달다는 뜻으로 달래강에서 비롯되었어요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속리산 최고봉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꿨으나
아직 천황봉으로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문건들이 여전히 많아요
우리나라에 천왕봉(天王峯)이란 이름을 가진 산만 해도 10여개나 되지요
속리산 천왕봉도 그 중의 하나이지요 천왕석문을 지나 비로봉으로 향하지요
비로(毘盧)는 비로자나불의 줄인 말로써 인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이지요
이는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하지요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온 다음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췄어요
깜작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띄고 사방팔방 빛을 발하고 있었지요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고 하지요
그후 이곳을 비로봉(毘盧峯)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요
등산로 옆으로 바위가 마치 서 있는 듯 모습을 한게 있어요
그게 입석바위이지요
그 옆에 보일 듯 말듯 신선대(神仙臺)가 있어요
그 옛날 신선이 와서 놀다가 갔다는 전설이 전하며 그 밑에는 경업대가 있어요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의 무예 수련장으로 전하는 곳이지요
조금 더 가면 청법대에 다다르지요
드디어 사람들이 속리산 정상으로 착각하는 문장대에 이르지요
문장대 이정표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어요
"문장대는 원래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을 명시한 책 한 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文藏臺)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문장대 위에 올라서니 정말 가마솥만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지요
가뭄에도 마늘날이 없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할 뿐이지요
사방은 확 트여 있고, 백두대간, 아니 속리산 주능선이 길게 굽이져 흘러 내리고 있지요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편에 ‘속리산 문장대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누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중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문장대를 지나면서부터 속리산을 완전히 벗어나지요
백두대간은 북동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정감록에 보면 비산비야(非山非野)라는 말이 있어요
비산비야는 결에서 피난처를 말한 것으로,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는 정감록의 삼비문, 즉 송가전(松家田)의 마지막 전(田)을 뜻하는데
첫째 송(松)은 임진왜란 때를, 가(家)는 병자호란으로, 사람들은 말하기도 하지요
마지막 피난처인 전(田)을 비산비야(非山非野)라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지역 그 자체가 피난처가 될수 없음을 말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뜯어보면 대부분 비승비속(非僧非俗)에 가깝지요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떠나지 못한 시골 사람들은 대도시의 삶을 부러워 하지요
말로만 전원생활을 찬양하면서도 명절이 아니면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도회지에 모여 살고 있어요
이들은 환상적인 풍경의 자기 고향을 놔둔 채, 대도시 근교에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지요 주말마다 도심을 떠나 대도시 근교의 별장에 머물며
시골 고향의 아름다운 풍광을 입버릇처럼 자랑하지요
맞아요 우리 도회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정쩡하지요
어중간한 인간이자 반승반속(半僧半俗)이요 비승비속(非僧非俗)이지요
저토록 아름다운 고향을 멀리 두고 중간에서 비틀거리며 물가에 집을 짓고 싶어하지요
어리석은 꿈을 접지 못하고 그저 그림 속에서 환상적인 시골 고향의 풍광을 만날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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