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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월드컵 유치 이야기

하라배 2018. 2. 28. 12:28

 

♣ 2002월드컵 유치 이야기 ♣

2002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하나로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축구 역사상 세계 4강신화를 창조한 쾌거 였어요

허지만 이 영광스런 월드컵을 유치하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지요

당시 일본축구계는 벌써부터 2002년 월드컵유치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개최지의 최종 결정은 96년6월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 결정 나지만 일본은 이미 전국15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경기장 개·보수계획을 세우는 등 대회유치를 위한 준비작업에 발빠른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지요 

  대회개최까지 앞으로 9년이나 남긴 시점에서 벌써부터 일본전역에는 월드컵 붐이 불기 시작했을 정도 였어요

당시 국제축구연맹에서는 94년 미국, 98년 프랑스로 개최지를 확정하였고

2002년 개최지는 95년 후보신청을 받아 96년6월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였지요

그 동안 월드컵은 구주와 중남미에서 번갈아 개최돼 당시로는 아시아개최가 유력시 되고 있을때라 일본은 발빠르게 움직였던 거지요

아벨란제 FIFA회장은 『2002년에는 아시아에서 개최되는게 바람직하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해 왔었고 실제로

93년 11월 뉴욕에서 실시된 미국월드컵 조 추첨행사 때는 『현재로선 일본에서 제시한 개최계획안이 가장 좋다』고 밝힌바 있었지요

이렇듯 2002년 월드컵은 일본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어요 그

런데 뒤늦게 우리나라에서도 2002 월드컵 유치 이야기가 나왔어요

3회 연속 월드컵에 참가하는 한국선수단 격려만찬에서 대통령이 느닷없이 2002월드컵 유치경쟁에 뛰어들겠다고 운을 뗀 것이지요

러면서 경기력 향상이 월드컵유치를 위한 선결과제 인데 우리는 3회연속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일본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지요

개최국 자동출전의 이점이 있다고는 하나 경기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대회개최를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우리가 승산이 있다고 말했어요

물론 그동안 계속되어온 군사정권에서는 88올림픽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루었기 때문에

문민정부에서도 보란듯 무언가 한건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숨어 있었지요 몇일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청와대로 불려 갔어요

관계부서 장관들과 함께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정회장이 늦었지만 총대를 메라고 했지요

부친인 정주영회장이 모두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88올림픽을 완벽하게 유치 했듯이

그 아들인 당신도 이번 2002 월드컵을 멋지게 유치해 보라고 했어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몽준 회장은 자의반 타의반이었지만 그날이후 전격 월드컵 유치작전에 돌입했지요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겸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현대를 앞세워 적극적인 유치전에 나섰어요

월드컵 개최지 결정 투표권이 있는 21명의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 나라 중 현대종합상사 지사가 없던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

독일, 아르헨티나 등에는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현대종합상사 해외 지사를 특별히 따로 설치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FIFA 집행위원 소재국에 주재하는 상사원들에게 집행위원 전담맨을 지정해 그들의 취미생활은 물론 가족사까지 파악해

이 정보를 대한축구협회에 직접 전달하였고 이 정보는 집행위원의 마음을 움지기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

당시 정몽준 회장은 1년 동안 지구를 무려 12바퀴나 돌 정도로 집행위원들을 만나러 다녔지요

1995년 월드컵 유치 붐 조성을 위해 세계적인 축구팀 브라질 대표팀을 국내로 초청하려 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원래 초청 비용은 30만 달러 안팎이었지만 1백 20만 달러가 소요 되었어요

브라질 대표팀을 유치 경쟁 라이벌인 일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급했지요

이 돈도 물론 정몽준 회장 주머니에서 나왔어요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많은 노력을 기우렸지요

득표에 도움이 되는 인사를 최우선적으로 만났어요

국제축구연맹(FIFA)에 표를 가진 각국 지도자들과의 정상회담과 주한대사 접견, 심지어 해당국의 유력인사 방한 등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월드컵유치에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지요 대통령은 존 메이저 영국총리,장쩌민(江澤民)중국국가주석,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등에게 월드컵 유치를 위한 정상차원의 협조를 당부하며 정상외교 채널을 풀 가동 했어요

그동안 FIFA집행위원 21명중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났고 영향력이 큰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잭 워너 위원은 세번이나 만났지요

홍콩의 헨리 콕 위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사자 면담은 물론 메이저영국총리와 장쩌민 중국국가주석에게 협조를 요청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어요

그러자 일본에서도 난리가 났지요 다 된밥에 재뿌리는 한국을 비난하기도 하였지만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총리의 취임이후

한.일간 유치경쟁은 더욱 가열되면서 FIFA집행위원 21명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기도 하였어요

그러면서 일본은 맨투맨 작전으로 나갔지요

우리도 이에 질세라 맨투맨 작전을 구사 했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최호중(崔浩中)자유총연맹 총재에 이어

이양호(李養鎬)국방장관을 보냈으며 아르헨티나에는 이홍구(李洪九)신한국당대표를 특사로 보냈지요

김영수(金榮秀)문화체육부장관은 특사자격으로 카메룬과 튀니지.모리셔스를 방문해 FIFA위원들및 정부 각료들을 만나 설득작전을 폈어요

김영삼대통령은 개최지결정 예정일에는 FIFA집행위 최종설명회용 비디오에 직접 출연해 한국개최의 당위성을 강조키로 돼있었으나

공동개최로 결정되는 바람에 불발로 그쳤지요 결국 늦게 뛰어든 유치경쟁이었지만 민관이 함께한 유치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끝까지 간다면 일본이 불리하다는것을 간파한 아벨란제 FIFA회장의 중재로 "한일 공동개최"라는 타협점을 찾았어요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사람은 정몽준 회장 한 사람 뿐이었지요

당시 정몽준 회장은 일본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길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현대상사의 피나는 노력과 거미줄 같은 정보망에 의해서 우리가 이긴다는것을 확신할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결국 대통령의 권유로 한일 공동개최를 수용하게 되었어요 그

리하여 치열한 유치경쟁은 끝을 맺었지만 결선투표까지 갔다면 88 올림픽 유치 때처럼 우리나라가 승리 했을거라는 세계축구계의 후담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만약 현대의 정몽준 회장이 없었고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지 못했다면 한국 축구의 현실은 어떠했을까요?

월드컵 유치후 4강이라는 신화는 물론 이후 월드컵 수익금을 통해 전국의 유소년들을

육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월드컵 효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요

월드컵 개최가 없었더라면 한국 축구는 지금도 누런 잔디가 깔린 종합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뿐만이 아니지요

정몽준 회장이 1995년 대한축구협회에 낸 사비는 무려 43억 7천만 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협회 결산액 57억원 중 무려 76.6%에 이르는 금액이었어요

당시 대한체육회 가맹 39개 경기단체 회장 출연금 중 정몽준 회장에 이어 2위로 많은 돈을 낸 레슬링협회 이건희 회장의 출연금이

12억 7천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지요

정몽준 회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뒤 비좁은 협회 사무실에서는 월드컵을 준비할수 없다고 밝히며

축구회관 건립 비용 170억원중 자비로 65억 원을 충당하기도 했어요

당시 축구회관 건립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이었냐면 당시 협회 예산이 54억원이었던 걸 감안했을때 무려 1년 예산의 세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 여기에 들어간 셈이지요 정몽준 회장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 산하에는 프로팀 울산현대와 실업팀 울산현대미포조선이 있었어요

이 두팀이 매년 최대 300억원 정도를 쓰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어요 현대학원 산하에 현대중, 현대고, 울산대(이상 남자), 현대청운중, 현대정보과학고,울산과학대(이상 여자)가 있고

여기에 또 울산지역의 초등학교(7개), 중학교(3개), 고등학교(1개)에 운영비를 보조하였지요

4월부터 11월까지 중고교 주말리그, 10월에는 울산현대단장기 초등학교 축구대회 11월에는 조기축구대회인 처용컵과 어머니 축구대회까지 열었어요

그렇게 정몽준 회장이 1년에 축구를 위해 쓰는 돈만 500억 원이 넘었지요

또한 K리그가 메인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손을 내민 것도 바로 정몽준 회장의 입김이 강력한 현대오일뱅크였어요

현대오일뱅크는 2011년부터 K리그 메인 스폰서를 자처했고 이후 K리그 챌린지 또한 메인 스폰서로 후원하고 있었지요

정몽준 회장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한국 축구와 K리그에 실로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지요

이렇게 축구를 위해 주판알 튕기지 않으며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이가 바로 정몽준 회장이었지요

사람들은 "돈이 전부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돈이 아무리 있어도 열정과 사랑이 없으면

그 많은 돈을 주저하지 않고 선뜻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미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어요

아무튼 재계는 재계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일본과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였으나 정작 월드컵 유치에 숨은 공로자는 따로 있었지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나선 대표팀이 무패 행진을 내달리며 가볍게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기 직전 한 외신 보도를 접했어요

"전용구장 하나 없는 축구 불모지인 한국에서 월드컵 2회 연속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있다"는 비아냥 섞인 보도였지요

당시 우리는 전용구장은커녕 제대로 된 잔디구장 조차 없던 시절이었지요 이 보도를 보고 화가 난 박태준 회장은 곧바로

관계자들을 불러 당장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도록 지시했어요

국내엔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만한 기술도 없던 시절이라 해외 유명 축구전용구장을 돌며 발품을 팔아 기술을 얻어왔지요

설계를 끝내고 부지를 확정하여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때 국정감사가 시작되었어요

이미 포항에는 종합운동장이 있던 터라 축구 전용구장이 무엇에 필요하냐며 국정감사장에 끌려간 박태준 회장은 국회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요

그렇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태준 회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10억원을 투자해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인 포항스틸야드를 건설했어요

트랙이 있더라도 잔디 구장이면 감지덕지하던 시절에 박태준 회장이 내린 결단과 안목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요 1

995년 국제축구연맹(FIFA) 실사단이 한국에 왔어요 2002월드컵 유치를 선언한 한국 축구 인프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이 실사단은 열악한 한국축구의 인프라를 핑계삼아 일본에게 개최권을 주려고 온 것이었어요

의도적으로 한국축구를 비하하러 온 실사단임을 알면서도 우리나라 축구협회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지요

기껏하여 그들을 데리고 간곳이 88올림픽때 세워진 잠실종합운동장이 전부 였어요

이곳을 둘러본 실사단은 축구전용구장 하나없는 나라가 무슨 월드컵을 개최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비아냥 거렸지요

이때 정몽준 회장은 한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그 전화는 바로 박태준 회장에게서 온 전화였지요 대한축구협회는 이 실사단을 바로 포항으로 안내했어요

포항스틸야드 축구전용구장을 돌아본 실사단은 세계 어느 축구장 보다 잘되어 있는시설에 깜짝놀랐으며 그것도 지방도시에 우뚝선

축구전용구장을 본 실사단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고 말았지요 나중에는 “원더풀”을 외치며 연신 감탄했어요

한국이 이렇게 좋은 축구전용구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는 거지요 이 일로인해 FIFA집행위원들의 마음은 확 바뀌어 한국을 다시보게 되었지요

이로서 뒤늦게 2002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은 우리나라는 정몽준 회장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박태준 회장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2002월드컵 한일공동개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지금은 지역마다 월드컵 경기장과 축구전용구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지만

당시 포항스틸야드가 아니었더라면 월드컵 유치는 물 건너 갔을것이며 그 동안 쌓아올린 공든탑도 일순간에 무너지는 참상이 되었을 것인데

박태준 회장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때문에 월드컵 유치 성공을 할수있게 되었지요

포항제철 축구단과 포항스틸야드를 만들어낸 박태준 회장은 이후 전남드래곤즈와 광양전용구장까지 탄생시켰어요 한국 축구에 아무것도 없던

시절 최고의 프로구단과 그에 어울리는 멋진 전용구장을 만들어낸 박태준 회장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요

박태준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직접 찾아 그라운드의 잡초를 뽑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였고

 2002 월드컵 유치에 크나큰 공헌자의 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리고 숨은 공로자로 또 한사람이 있었어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기업 운영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지만 한국 축구를 위해서 그가 한일 만큼은 간과해서는 안되는 인물이지요

김우중 회장은 1983년 프로팀 대우로얄즈를 창단한 뒤 훌륭한 유소년 선수를 발굴해야 프로팀도 강해진다는 뜻에 따라

거제초등학교와 거제중학교, 거제고등학교, 아주대학교에 연이어 축구부를 개설했어요 초등학교에서부터 프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시스템이었지요

그런데 그의 포부는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정몽준 회장에 이어 축구협회장까지 역임하면서 한국 축구 전체를 통솔했지요

그는 축구 협회장 당시 매년 축구협회 기부금이 30억원, 로얄즈 운영비 60억원 아주대 30억원 초·중·고 20억원 등 축구와 관련해서 200억원씩을 출연했어요

다소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계열사에 공문을 보내 일괄적으로 기부금까지 받아냈지요

그룹 총수로서는 부적절한 처사이기도 했지만 당시 한해 200억원의 어마어마한 돈이 한국 축구의 뿌리를 만드는데 쓰였다는 것까지 부정할수는 없어요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 총수시절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계열사 간 축구대회에 매번 선수로 뛸 정도로 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었지요

외국인 감독을 처음 영입한 것도 김우중 회장이었지요

국내에 외국인 감독이 생소하던 1990년 독일 출신 프랑크 엥겔 감독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헝가리 출신 비츠케이 감독을 영입했고

1996년에는 유고의 세큘라리치 감독을 데려왔어요

한국 축구의 세계화를 처음 구현한 것이지요

특히 비츠케이 감독은 1991년 21경기 연속 무패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 한국 프로축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인물로 평가받았어요

지금도 200억원이 엄청난 돈이지만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위해 매년 200억원씩을 투자했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김

우중은 회장은 먼 앞날을 내다보며 꿋꿋히 실행 하였지요

이전까지 영세했던 대한축구협회가 김우중 회장 취임 이후 지금의 모습에 뼈대를 갖췄다는 점도 크나큰 업적으로 평가할만 하지요

대우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로 인수될때도 다 팔아도 끝까지 축구단만은 안 된다고 버텼던게 바로 김우중 회장이었어요

당시 대우로얄즈 매각에 대해 함께 반대하며 김우중 회장을 지지한 인물이 바로 박태준 회장이었지요

김우중 회장 역시 박태준 회장과 함께 한국 축구 발전에 빠져서는 안될 위대한 인물이었지요

끝으로 한국 축구에 공헌한 사람중에 또 한분이 있지요

종교적인 논란이 있을수도 있지만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총재의 막대한 투자도 빼놓을수는 없어요

그가 창단한 일화천마는 한국 프로축구사에서 가장 강력한 팀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지요

물론 문선명 총재의 어마어마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이익을 따졌다면 절대 할수 없었던 일을 해낸 것이지요

문선명 총재는 일화축구단에 3,0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6번의 K리그 우승과 세 차례의 FA컵 우승, 그

리고 AFC 챔피언스리그(전신 대회까지 포함)도 1995년과 2010년 두차례 정상에 섰지요

2000년에는 우승을 위해 샤샤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몸값과 상관없이 그를 무조건 데려오라고 지시해 열흘 만에 샤샤에게 성남 유니폼을

입히기도 했어요 당시 샤샤는 계약기간 3년, 계약금 130만 달러, 연봉 30만 달러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역대 외국인 선수중 최고의 대우였지요

문선명 총재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레알마드리드와 유벤투스, 토트넘 등을 초청해 무려 다섯 차례나 피스컵을 개최한 것도 한국 축구를 사랑한 문선명 총재의 의지였지요

당시 한번 피스컵이 열릴때마다 드는 돈만 무려 200억원에서 300억원에 이르렀어요 지금 어느 기업이 이런 출혈을 할수 있을까요?

그들은 누가 뭐라해도 한국 축구의 산증인이며 위대한 인물이라 아니할수 없지요

아무튼 이러한 우여곡절끝에 2002 한일월드컵개최는 성공하였으며 우리는 그 후광에 힘입어 9회 연속 월드컵 축구대회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했어요

국제축구연맹(FIFA) 211개 회원국 가운데 본선에 9회 이상 연속 출전한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6개국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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