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서문. 인조는 이곳을 통해 受降壇으로 나아갔다
다음은 1637년의 仁祖實錄(인조 15년 1월 30일)이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上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上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大人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上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관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上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上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上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唱)하게 하였다.
上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上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大君 이하가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上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上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上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仁祖實錄』, 인조 15년 1월 30일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冕服)도 입지 못하고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 입은 초라한 행색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드디어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 나아갔다.
(受降檀: 항복의식을 받아들이든 단)
淸 태종은 9층의 계단으로 된 수항단에
황색 장막과 일산(日傘)을 펼쳐 놓고
용상(龍床)에 정좌하여
인조 일행의 도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상 아래에 도착한 인조는 청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후 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뜻에서 비석을 세우게 하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이다.
삼전도비의 건립은 淸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당시의 정세상 거절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淸은 비문 작성을 통해 조선에 대한 확실한
군신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하려 하였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공사를 지시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비단(碑壇) 조성이 강행되어
1637년 11월 3일 비단이 완공되었다.
11월 25일에는 淸나라 사신이 碑壇을 조사하고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로서 전서(篆書)로 쓰여 있다.
높이 395센티미터, 너비 140센티미터이며 이수와
귀부를 갖춘 대형 비석이었다.
비의 앞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문자로 20행,
왼쪽에는 몽고 문자로 20행이 새겨져 있다.
뒷면은 한문으로 자경 7푼의 해서(楷書)로 새겼다.
삼전도비의 문장을 누가 쓸 것인 가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따랐다.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淸의 황제를 찬양하는
굴욕적인 글귀를 쓰고 싶은 신하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고,
비문을 검토한 인조는 세 문장가가 지은 비문을
심사하여 보냈다.
송파구 석전동의 삼전도비(大淸皇帝功德碑)
청나라는 비문의 내용에 대해 거듭 트집을 삼았고,
이경석이 비문 맨 앞에 ‘대청 숭덕 원년’이라 하여
淸의 연호를 먼저 쓰고,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 는
표현을 보고 비로소 만족하였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淸의 비위에 맞추어
비문을 다시 찬술하였지만,
이 글을 쓴 날 이경석은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경석은 이 글을 썼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사류들의 거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이경석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이경석의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서인 정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는 데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즉 이경석의 행위가 의리상 문제점이 많았다는 쪽은
노론에 서고,
이경석의 비문 찬술이 현실 여건상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에 선 것이 소론이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사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삼전도비는 분노에 찬 지역민들에 의해
다시금 땅 속에 매몰되었다.
그러나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을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 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송파구 삼전동의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현재에도 그 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사(義士?)가
나타난 것일까?
삼전도의 치욕이 있은 지 370년이 지난 2007년에는
붉은 페인트 글씨로 비석을 훼손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삼전도비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삼전도비를 통하여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명분만을 내걸고 수행하는
잘못된 전쟁은 후대의 역사에서
이제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다.
이조 500년 27대 왕중 16대 인종에 대한 평가가
최하위인 이유를 알만하다.
[여러 싸이트에서 발췌 압축 편집했음ㅡ에밀레]